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clips book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쿤데라
민음사

그 당시 토마시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20p

동정심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고통조차도, 상상력으로 증폭되고 수천 번 메아리치면서 깊어진,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해 느끼는 고통만큼 무겁지는 않다. 53p

인간은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난 후부터 육체에 덜 불안해했다. 또한 이제는 영혼이란 뇌의 피질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은 과학 전문용어에 가렸고 오늘날에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자아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하다. 65p

테레자에게 책이란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암호였다. 그녀를 둘러싼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뿐이었다. 특히 소설들. 그녀는 필딩에서 토마스 만까지 무더기로 소설을 읽었다. 책은 그녀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의 도피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책은 그녀에게 19세기 멋쟁이들이 들고 다녔던 우아한 지팡이와도 같았다. 책을 통해 그녀는 남과 자기를 구분 지었다. 78p

그런데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80p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85p

테레자는 그들보다 많이 읽었고 그들보다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독학자와 학교에 다닌 사람의 다른 점은 지식 폭이 아니라 생명력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의 정도 차이다. 삶에 몰두하는 테레자의 정열은 프라하에서는 탐욕스럽고 동시에 깨지기 쉬웠다. 91p

"당신을 위해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거야?" "당신이 늙기를 바라. 지금보다 열 살 더. 스무 살 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나약하길 바라. 당신도 나처럼 나약하길 바라."였다. 122p

중산모자는 우습게 보이거나 선정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의 유적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에 감격했다. 그들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정사를 나누었다. 거기에는 음란한 놀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만남은 매번 새로운 어떤 음탕한 짓을 상상했던 에로틱한 게임의 연장이 아니라 시간의 회복, 함께 보낸 과거를 기리는 노래, 저 멀리 사라져 버린 비감정적인 역사의 감정적 회복이었기 때문이다.  142p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144p

그러나 B를 위해 A를 배신했는데, 다시 B를 배신한다 해서 이 배신이 A와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혼한 여자 예술가의 삶은 배신당한 그녀 부모의 삶과는 닮지 않았다. 첫 번째 배신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배신은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들을 야기하며, 그 하나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먼 곳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149p

유럽의 아름다움에는 항상 의도성이 깃들었지. 항상 미학적 의도와 장기적 안목을 지닌 계획이 있었어. 이 계획에 따라 고딕 성당 혹은 르네상스 도시를 세우려면 수세기가 걸렸지. 뉴욕의 아름다움은 그 뿌리가 아주 달라. 비의도적 아름다움이지. 종유동굴처럼 인간이 의도 없이 태어난거야. 흉측한 형태가 어떤 계획도 없이 우연히 다른 형태들과 뒤섞이며 그 뒤섞임 속에서 불쑥 마술적 시의 광채를 발산하는 거지." 162p

"당신 힘을 가끔 내게 쓰지 않는 이유가 뭐야?"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프란츠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비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이 말은 아름답고 진실하다. 둘째, 이 말 때문에 프란츠는 그녀의 에로틱한 삶에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177p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192p

그날 그들 사이에 몰이해의 심연이 깊게 팼다. 195p

우리는 애교의 한복판에 있다. 비록 아무런 보장도 없는 이론적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성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런 행동. 225p

세월이 흐른 뒤 생각해보니 이 익명성이 나라에 아무런 위험도 주지 않은 채 그냥 스쳐 지나간 것 같지는 않았다. 거리나 집이 어느 하나 원래 이름을 되찾지 못한 것이다. 보헤미아의 온천 도시가 하루아침에 상상 속의 작은 소련으로 변했고, 테레자는 그들이 이곳으로 찾으로 왔던 추억이 압수당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도저히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없었다. 261p

그들의 사랑은 제국과도 같아서 제국을 떠받치는 이념이 사라지면 이념과 함께 제국도 멸망하는 것이다. 267p

그녀는 저게 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왜 프라하 공원 벤치가 물에 떠내려가느냐고. 그러나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쳤다. 그들에겐 그들의 덧없는 도시 한가운데로 강물이 수 세기 동안 흐르건 말건 아무 상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269p

그들은 토마시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상한 미소를 그에게 지어 보였다. 은밀한 공범자끼리 나누는 어정쩡한 웃음. 그것은 창녀촌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남자가 지을 만한 웃음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조금은 부끄러워하지만, 동시에 그 부끄러움이 피장파장이라는 점 때문에 즐거워한다.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연대감 같은 것이 형성된다. 283p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324p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344p

물론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키치는 유별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한다.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387p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394p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398p



덧글

  • 마리 2013/08/26 13:13 #

    읽다가 포기했던 책인데 다시 읽고싶네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