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clips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소래섭
웅진지식하우스

'명랑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정작 아무도 명랑해지지 않았던, '명랑'을 위해서 '명랑해질 수 없었던, 이상한 시절이었다. 34p

총독부의 '도시 명랑화'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도시인의 생활 교양 위생 등을 위한 시설을 갖추는 일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도시인의 생활과 도시 문화의 향상 증진을 방해하는 것들을 퇴치하는 일이었다. 43p

1914년에는 경성부 전체 예산의 44.3%, 1915년에는 47.1%가 오물 청소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47p

이것도 공원이냐
당시 경성의 인구는 30만을 웃돌았지만, 공원이라고는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나마 있던 한 개의 공원조차 관리가 부실했던 모양이다. 분뇨 탱크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모습이 나날이 퇴락해가는 공원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65p

이 시기 총독부가 내세운 '명랑'은 '건전'의 동의어로서 체제에 저항하는 것들을 억압하고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만을 양성하기 위한 규율 담론이었던 것이다. 총독부는 식민지 경영에 방해가 되는 것에 대해 저급하고 난잡하며 퇴폐적이고 불온하다는 딱지를 붙였다. 그와 반대로 체제 순응적인 감정과 가치는 모두 '명랑'이라는 코드 안에 편입시켰다. 그러자 '명랑'은 개인의 기질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을 넘어 '좋은 것'을 의미하는 절대적 윤리가 되었다. 70p

1934년 저명한 평론가 김태준은 <<조선일보>>에 발표한 <조선의 가요는 어데로>라는 글에서 "옛 노래의 양식에서 그 편형을 찾아내어 현대 가요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라"라고 지적한 바 있었다. 김종한과 김태준 외에도 많은 지식인이 민요조 유행가를 서구적 양식의 유행가나 퇴폐적 유행가의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105p

특히 연애는 학교가 배출한 근대적 지식 계층이 기존의 사회관계들로부터 자신들을 차별화하고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문화적 구성물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패션에서 새로운 시 공간경험, 라이프스타일에 이르는 폭넓은 변화를 동반했다. 이를테면 상대방을 배려한 말쑥한 옷차림, 영화관이나 찻집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것, 주말이면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등 연애와 관련된 라이프스타일은 모두 이 시기에 새롭게 나타난 것들이었다. 낯설고 새로운 사랑의 형식이었던 연애는 발달한 문명을 상징했던 서구의 사랑 형식에 대한 동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연애는 신성한 가치를 지닌 대상이자 근대인으로서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이 되었다. 135p

감정사회학 연구자인 J.M.바바렛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감정을 가리키는 어휘의 종류와 수가 자본주의 이전에 비해 축소되었다고 한다. 말로 표현되는 감정의 수가 줄었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감정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66p

명랑은 강압적 통제를 정당화하려는 총독부의 통치 이데올로기이자, 감정의 근대화 과정에서 새롭게 강조된 감정들 중 하나가 식민지 조선에서 얻은 특수한 이름이었다. 식민지적 억압과 자본주의의 진행이라는 사건이 맞물리면서 명랑의 의미는 확장되었고, 그 활용도 또한 증가했던 것이다. 168p

<<조선일보>> 체육부장으로 일했던 홍종인은 이렇게 썼다. "그동안 시절은 바뀌었다. 산보 시대는 갔다. 때는 하이킹 시대이다. 명랑한 하이킹! 바득바득 핏대를 올리고 싸우는 따위가 없는 유유자적의 스포츠이다. 자연을 쓰다듬으며 건강을 말하는 하이킹 이데올로기의 소유는 오늘 청춘의 자랑이다. 자! 하이킹!" 186p

해맑은 아이의 미소나 높고 푸른 하늘을 닮은 것이 명랑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은 명랑하지 않은 시대에 더 번성한다. 고통이 크고 슬픔이 깊을수록 웃음에 대한 욕망은 더 세차게 끓어오른다. 219p

이 시기 문인들이 저토록 우울에 탐닉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나라를 잃은 설움과 강고해지는 일제의 억압, 때마침 유입된 서구 퇴폐주의의 범람 등이 뒤섞여 한 치 앞도 전망할 수 없는 어둠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233p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다방의 범람 시대'는 1940년까지 이어졌다. 문인들뿐만 아니라 근대의 문화와 감성을 호흡하려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다방에 몰려들었다. 236p

1930년대 경성의 다방은 이전의 폐쇄적인 '사랑방 문화'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공공 영역으로서 사적 개인들의 공적 만남을 매개하는 사교장의 기능을 담당했다. 다방은 단골로 드나들던 동인들의 회합처로서 동인 내부의 구심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향의 문인이나 다른 장르의 예술과와도 교류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다방은 정신을 집중하고 예민한 감각을 훈련할 수 있는 고요하면서도 감각적인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창작을 위한 사색이나 집필에도 적절한 '공동 서재'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요컨대 다방은 창작과 교류에 필요한 물리적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문인들이 자신들의 예술가적 자의식을 확인하고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238p

1930년대의 문인들에게 다방은 우울과 슬픔의 성지였다. 종교인들이 성지순례를 통해 거듭나듯, 그들은 다방에서 예술가로 다시 태어났다. 240p

명랑은 눈물과 어울린다. 명랑은 우울과 어울린다. 그것이 1930년대부터 생겨난 현대적인 우울과 현대적인 명랑의 독특한 성격이다. 245p

모더니즘은 눈물로 얼룩진 1920년대 문학을 극복할 대안이었다. 김기림이 말하는 모더니즘의 핵심은 '지성에 의한 감정의 통제'였다. 감정의 과잉을 막기 위해서는 지성을 통해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는 가운데 창작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257p

우리는 조금 더 명랑해져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진짜로 명랑해져야 한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규정해놓은 '건전'의 허울에 불과한 명랑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명랑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건설하는 '부정의 정신'이 약동하는 명랑을 익혀야 한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진실한 감정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73p

20세기가 억지로라도 명랑해져야 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어떻게 해서든 행복해져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명랑'에서 '행복'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진실한 감정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한다. 277p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clips

- 딱하고 일방적인 사회 구조에서 다양하고 수용의 폭이 넓은 사회로 변화하는 데 제가 만든 광고가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것이 제가 느끼는 보람이기도 합니다. 21p- 연애편지를 쓴다고 해봅시다. 편지 하나에는 '보고 싶습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에는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맘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 내용보기

제주 엿보기: 올레1코스, 한라산, 올레 18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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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 미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가운데 시장 모델에 바탕을 둔 정책이 근간을 차지했다. 말하자면 주택은 사고 파는 것이라는 인식, 곧 주택의 높은 상품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57p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는 부의 상징이라는 정태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축재의 원천이나 수단이라는 동태적 의미까지 포함한다.다시 말해 아파트 자체가 재산증식의 가장 유력한 방편이 되어 온... » 내용보기

maria cervan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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